입력 없는 ERP — 패러다임의 역전
ERP의 본질은 오랫동안 “사람이 시스템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발주서, 출고 전표, 근태 기록 — 누군가 키보드 앞에 앉아 빈칸을 채워야 데이터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ERP는 그 관계를 통째로 뒤집습니다. 사람이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사람에게 결재를 요청합니다.
ERP의 숨은 전제 — “사람이 빈칸을 채운다”
섹션 제목: “ERP의 숨은 전제 — “사람이 빈칸을 채운다””수십 년간 ERP의 화면은 한 가지를 전제했습니다. 사람이 빈칸을 채운다. 발주서의 품목과 수량, 출고 전표의 LOT 번호, 근태의 출퇴근 시각 — 누군가 키보드 앞에 앉아 하나씩 입력해야 데이터가 생겼습니다. ERP가 “좋아진다”는 건 그 입력 폼이 더 편해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전제 위에서는 자동화가 아무리 발전해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사람이 입력의 병목이기 때문입니다. 화면을 100배 예쁘게 만들어도, 빈칸을 채우는 손은 여전히 사람의 손입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짚고 갑니다. “그럼 입력을 자동으로 채워 주면 되지 않나?” 자동 완성, 추천 값, 일괄 등록 같은 기능이 바로 그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여전히 “폼이 있고 사람이 그 폼을 책임진다”는 전제 안에 있습니다. 편의 기능을 아무리 쌓아도 사람이 폼의 주인인 한, 사람은 병목으로 남습니다. 진짜 변화는 폼을 더 똑똑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폼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Agentic ERP — 입력 창을 없앤다
섹션 제목: “Agentic ERP — 입력 창을 없앤다”우리가 잡은 방향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입니다. ERP에서 사용자 입력 창을 제거합니다. 데이터 입력과 트랜잭션 수행은 에이전트가 합니다. 사람은 빈칸을 채우지 않습니다. 에이전트가 맥락을 읽고 초안을 만들어 오면, 사람은 그것을 승인하거나 수정 지시만 합니다.
같은 차이를 ERP의 구성 요소별로 쪼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바뀌는 건 화면 하나가 아니라 ERP를 이루는 모든 층의 주어입니다.
| 구성 요소 | 기존 ERP | Agentic ERP |
|---|---|---|
| 데이터 입력 | 사람이 폼에 타이핑 | 에이전트가 사건을 읽어 초안 생성 |
| 트랜잭션 실행 | 사람이 저장·전송 | 에이전트가 준비, 사람 컨펌 시 실행 |
| 사람의 역할 | 입력자(생산자) | 검수자(승인자) |
| 병목 | 사람이 폼 앞에 앉는 속도 | 사람이 판단하는 마지막 1% |
| 설계 출발점 | 화면·메뉴(명사) | 업무 사건(동사) |
한 장면으로 보는 역전 (예시 시나리오)
섹션 제목: “한 장면으로 보는 역전 (예시 시나리오)”추상적으로 들리니 한 업무를 따라가 봅니다. 자재 재고가 기준선 아래로 떨어진 상황입니다.
- 그때 — 담당자가 매일 재고를 들여다봅니다. 부족을 발견하면 구매 메뉴를 열고, 품목·수량·거래처를 빈칸에 입력하고, 발주서를 만들어 결재선에 올립니다. 발견도 입력도 모두 사람 몫.
- 지금 — 에이전트가 재고 사건을 먼저 감지합니다. 과거 발주 이력과 단가를 참고해 발주 초안을 만들어 둡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보냅니다: “A 품목 재고가 기준선 아래입니다. 평소 거래처로 N개 발주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진행할까요?”
- 사람의 역할 — 빈칸을 채우는 게 아니라, 그 한 장면을 보고 승인 / 수량 수정 / 반려 중 하나를 고릅니다. 의사결정의 마지막 1%만 사람이 쥡니다.
관계의 방향이 뒤집힌다 — Human-on-the-Loop
섹션 제목: “관계의 방향이 뒤집힌다 — Human-on-the-Loop”같은 업무를 명사형과 동사형으로 보면 결과물이 완전히 갈립니다.
| 설계 질문 | 명사형(화면 우선) | 동사형(업무 우선) |
|---|---|---|
| 먼저 묻는 것 | ”어떤 화면이 필요한가" | "어떤 의사결정 사건이 일어나는가” |
| 산출물 | 발주 입력 폼, 재고 조회 메뉴 | 발주한다 · 재고를 확인한다 · 승인한다 |
| 에이전트가 쥐는 것 | 없음 — 사람이 폼을 채워야 함 | 동사 = 호출 가능한 업무 단위 |
| 화면의 위치 | 설계의 시작 | 설계의 끝(승인 뷰만) |
왜 이게 어려운가 — 그래서 가치 있다
섹션 제목: “왜 이게 어려운가 — 그래서 가치 있다”입력 창을 없앤다는 건, ERP를 “데이터를 받는 그릇”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바꾸는 일입니다. 이건 화면 한두 개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라, 데이터 모델·권한·감사·승인 흐름 전체를 에이전트 중심으로 다시 짜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감사 로그는 이제 “어느 직원이 입력했나”가 아니라 “어느 에이전트가 어떤 근거로 초안을 만들었고, 어느 사람이 승인했나”를 함께 남겨야 합니다. 권한도 “에이전트가 이 동사를 자율로 실행해도 되는가, 아니면 반드시 사람 컨펌이 필요한가”까지 나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자결재를 그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 모든 업무가 결국 승인으로 수렴하기 때문입니다. 발주도, 지출도, 근태 정정도, 끝에는 “누군가 승인한다”가 있습니다. 승인이라는 관문을 에이전트-사람 구조로 먼저 세워 두면, 나머지 업무가 그 위에 얹힙니다.
이 도약은 〈생산성 임계 돌파〉의 직접적 결과이자 원인입니다. 6대 축에서 ②(업무 주체 전환)와 ③(입력 없는 ERP)이 맞물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6대 축〉).
인간(GUI)과 AI(MCP)가 같은 ERP를 쓰는 결합 아키텍처의 공학적 논증은 〈큰 그림 Part 4〉에, 이 방향을 택한 동기는 〈왜 AI 에이전트가 일하는 회사인가〉에 있습니다.